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르디아누스 3세 (문단 편집) === 불분명한 죽음 === 19세의 고르디아누스 3세는 자신의 장인 티메시테우스를 굉장히 신뢰했고, 그가 가진 능력과 경험에 의지했으므로, 티메시테우스의 불분명한 죽음에 충격을 받았다. 이후 황제는 꽃다운 19살의 나이에 244년 2월 죽었다. 그런데 이 죽음은 불분명하고 아직까지도 의견이 둘로 갈린다. 장인이 사망한 직후, 내각 내 서열 2위였던 율리우스 프리스쿠스가 고르디아누스 3세에게 자신의 동생 필리푸스 아라부스를 후임자로 추천한 것과 고르디아누스 3세는 244년 2월 두 번째 전투를 전후로 완전히 근위대와 군단병 모두에게 신뢰를 잃어버렸던 것은 두 가지 버전의 주장 모두에서 공통되게 언급된 사실이다. 이와 함께, 확실한 또 다른 사실은 필리푸스 아라부스를 임명할 때 소년 황제와 율리우스 프리스쿠스가 고르디아누스 가문 출신으로 고르디아누스 3세의 또 다른 외삼촌(고르디아누스 2세의 남자형제) 혹은 모후의 사촌오빠로 추정되는 원로원 의원 마이키우스 고르디아누스를 새로운 근위대장에 지명해 그에게 상당한 권한을 줬다는 점이다. 따라서 연구자들은 필리푸스 아라부스와 그의 형 율리우스 프리스쿠스가 프라이토리아니를 장악하고 있었던 부분을 주목하고 있다. 왜냐하면, 당시 필리푸스 아라부스의 행보가 두 주장에서 불분명할 정도로 갈리고 있고 소년황제의 몰락은 프라이토리아니가 지지를 거두면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먼저 로마 측의 고대기록, 즉 잘 알려진 첫번째 주장에 따르면 젊은 황제는 낙담한 나머지 13살 때 상황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자연스레 황제 경비는 느슨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티메시테우스의 후임 근위대장이 된 필리푸스 아라부스는 일부러 병사들에게 생필품 배급을 늦췄고, 이에 병사들은 생필품 부족을 불평했다. 이후 그 불만은 심각해졌고 병사들은 나이값도 못 하는 어린 황제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여겼다. 그리고 이를 틈 타 근위대장 필리푸스는 형[* 이 이야기를 기록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는 이부동생이라고 적혀있다. 하지만 1990년 이후 필리푸스와 프리스쿠스는 동복형제로 밝혀졌고 나이는 프리스쿠스가 더 많다는 것이 밝혀졌다.] 프리스쿠스 등과 공모해 병사들을 선동한 다음 244년 2월 11일 유프라테스 강과 아보라스 샛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고르디아누스 3세를 암살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또 다른 주장에 따르면 이야기는 완전히 다르다. 이는 사산 왕조 측의 주장과 로마 측의 주장을 합친 새로운 주장으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로 대표되는 첫 번째 주장보다 당시 정황상 더 맞고 현실적인 시니라오로 평가받는다. 이 버전에 따르면, 고르디아누스 3세는 장인 사후 멘붕 상태였지만 마냥 손을 놓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율리우스 프리스쿠스는 소년 황제를 설득해 군심을 다독이게 했으며, 이때 프리스쿠스의 추천으로 공백이었던 근위대장 자리는 필리푸스 아라부스가 맡게 됐다. 이후, 새로운 근위대장과 함께 그는 군 수뇌부들을 모아, 군대에게 지지를 호소했고, 244년 2월 진격했다. 하지만 이 진격은 사산 왕즈군의 반격을 받아 혼전 중 패배한다. 이어 그들은 크테시폰 공방전을 펼쳤는데, 사산 왕조 측의 기록들에 따르면, 사산 왕조 군대와 크테시폰을 놓고 격렬한 전투를 벌이다가 로마군은 대패하고 고르디아누스 3세는 낙마 후 전사했다. 이는 [[동로마 제국]] 측의 기록도 비슷한데, 조나리스와 케드레노스는 일관되게 고르디아누스 3세가 페르시아와 크테시폰에서 교전 중 전사했다며 샤푸르 1세와의 대결에서 고르디아누스 3세가 죽었다고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로마군은 패퇴했는데, 고르디아누스 3세 전사는 제국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겼다. 로마군은 사태 수습을 위해, 동방 상황에 능통하고 군을 안정적으로 통제한, 현직 근위대장 필리푸스를 지지해 그를 황제로 옹립했다. 따라서 케펜호펜을 비롯한 일부 학자들의 경우, 교전국 페르시아의 기록, 동로마 시대의 기록, 샤푸르 1세 측의 기록 등을 근거로 고르디아누스 3세가 필리푸스 아라부스 등의 음모로 암살되었다고 단정짓지 않고 있는데, 두번째 주장은 이전까지의 주장보다 의문점이 덜 하고, 양측의 기록을 토대로 구성됐다고 평가받는다. 이런 고르디아누스 3세의 죽음 못지 않게 이후의 사태 수습 방향도 두 가지 버전이 전해진다. 첫 주장의 연장선이기도 한 첫번째 버전에 따르면, 황제를 암살한 직후 원정 중인 병사들은 후임 황제로 당시 근위대장이던 필리푸스를 지지했고, 필리푸스는 즉위 후 그곳에 고르디아누스 3세의 시신을 묻고 그를 기억하기 위한 기념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또 다른 버전에 따르면, 로마군을 이끈 필리푸스 등이 원로원과 시민들에게 자상하고 너그러운 성품으로 인기가 있던 고르디아누스 3세의 평판과 새 황제의 정통성 확보 등을 의식해, 죽은 황제의 시신을 수습한 뒤 로마로 옮기고 신격화시켰다고 한다. 한편, 고르디아누스 3세의 아내 트란퀼리나는 남편이 암살된(또는 전사한) 직후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다른 고대기록에 따르면 짤막하게 다른 남성과 재혼해 딸을 낳고 조용히 살았다고 한다. 반면 고르디아누스 3세의 어머니 안토니아 고르디아나, 남자 친척이자 근위대장 마이키우스 고르디아누스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래서 이들은 필리푸스 아라부스나 로마 근위대 병사들에게 남은 고르디아누스 가문 사람들은 제거된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